2-1 전기철도 발달사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산업의 고도화에 따라 물자 유통과 도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수송난과 교통난의 해소가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자동차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도로를 꾸준히 확장하여 왔지만 이제는 도로 교통이 한계상황에 부딪쳐 교통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더구나 자동차는 공기 오염, 소음 발생 등 환경 문제를 유발하여 현대인의 쾌적한 삶을 저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에도 불구하고 교통과 환경 문제는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의 주요 정책 과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전기철도는 효율적인 교통수단으로서 교통문제 해결의 최선의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전기철도는 물자 유통을 원활히 하는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급격하게 팽창하는 도시인구의 이동을 원활하게 해주는 최적의 교통수단으로 부상하였다.

20세기 들어 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철도의 각종 수송수요가 대폭적으로 증가되고 있다. 이에 대한 효율적인 대처 및 경제적인 투자방안에 대하여 선진국에서 많은 연구를 통한 비교분석 결과 수송력 증강과 환경보존을 위한 최적의 대안으로 신선 건설비의 10% 미만이 소요되는 기존선 전철화를 적극 추진하였으며, 선진국의 철도 전철화율은 일본이 60%, 프랑스 45%, 독일 49%, 스웨덴 72%(97년 UIC 통계) 등으로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특히, 교통발달과 경제성장에 따라 날로 심화되는 환경오염 문제는 21세기 최대과제로 세계 도처에서 발생되는 엘리뇨 현상에 의한 기상이변 등 인류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전기철도는 소음, 매연, 폐유처리 등 환경오염이 거의 없는 환경친화적인 대중 교통수단이다. 특히, 타 수송수단과 대기오염 정도를 비교해보면 전기철도를 기준으로 자동차는 8.3배, 트럭은 30배 정도 많은 대기오염 물질을 배출하고 있어 환경보존을 위한 최적의 교통수단으로는 기존선 전철화와 전기철도 확충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오늘날 철도기술의 발전 추세는 열차의 고속화, 자동화에 따른 서비스 개선과 경영다각화 노력의 일환으로 고속철도, 자기부상열차 및 경전철 등 첨단기술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면 전기철도의 획기적인 발전의 전기가 이루어질 것이다.

국내 전기철도 도입 초기에는 기술 및 자재를 외국에 의존하였으나, 수도권 광역전철망 건설과 중앙선 제천~영주 및 영동선 영주~철암 전철화 사업을 통한 기술축적과 국산화 노력에 힘입어 몇 가지 경제성이 낮은 소량 품목의 소요기자재만이 외국에서 수입되었고, 90% 이상 국산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설계ㆍ시공기술은 100% 국내 기술진에 의해 가능할 수 있게 되어 괄목할 만한 기술발전을 이룩하였다.

 
가) 광복 이전의 전기철도
전기철도의 시작은 1879년 5월 31일 독일의 지멘스(Siemens)사와, 할시세(Halsice)사가 베를린에서 열리는 세계산업박람회에 제3궤조 방식으로 직류 150V, 3마력 2극 직권전동기를 사용하여 시속 12km, 20인승 전기기관차를 출품한 것이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81년에 베를린 남부 근교에서 영업을 개시한 것이 전기철도를 최초로 실용화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독일 지멘스의 기술을 도입하여 1883년 프라이던에서 전차가 운행되었고 미국에서는 1880년에 에디슨이 소형 전기차를 개발하여 시내전차를 운행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는 1890년에 동경 우에노 공원에서 박람회가 열릴 때 미국에서 도입한 15마력 500V용 전차가 처음으로 선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899년 5월 4일 미국인 콜브렌과 보스트위크 양인이 조선왕실의 허가를 받아 서대문~홍릉 간에 직류 600V 방식의 노면 전차를 처음 운행한 것이 전기철도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920년대 일제 하에서 사철인 금강산선 전기철도를 1921년 착공하여 철원~금화간을 1924년 8월 1일에 개통하였고 금화~내금강간은 1931년 7월 1일에 완공하여 철원~내금강 간 전구간 116.6km를, DC 1,500V 방식으로 완공하여 전기기관차 운행이 본격화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한국철도의 전철화를 위해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전력정책 기본계획 조서’를 작성하였다. 1926년 11월 총독부에서는 전력정책 기본계획 수립을 위해 일본철도의 전(前) 전기국장 요시하라 시게나리를 한국의 철도ㆍ체신 양국의 촉탁으로 임용하였고 1931년 12월까지 5개년에 걸쳐 3권의 방대한 조사 자료를 완성하였다. 이 조서는 전력의 발생, 분배, 이용의 종합적인 추세를 고려하여 장기 대책을 수립하는데 필요한 기본자료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자료는 단순한 기본조사에 불과하였고, 1932년 이후 다시 철도 전철화의 실행계획이 착수되었다. 전철화 예정 구간으로서 우선 채택된 것은 경원선의 복계~고산 간 53.9km 구간이었다. 이 구간은 한국 중부의 산맥을 동서로 횡단하기 때문에 지형상 선로의 경사가 급하고 터널이 많아 증기기관차로서는 상행 견인력이 부족한데다가 상행 경사 운전의 불안정과 매연으로 인한 승무원의 질식 사고 등 운전상 곤란한 점이 많았다. 또한 특수열차에는 보조기관차를 연결하여야만 그 기능을 유지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 전선으로 향하는 수송량이 점차로 증가함에 따라 이 구간에서도 1938년에는 1931년에 비하여 대략 3배정도 수송량이 급증하였다. 따라서 이후에 증대될 수송량에 대비하여 이 구간의 전철화가 경원, 함경 양선의 수송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써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1935년 12월에는 이 구간의 전철화 계획이 공작과에 의해 입안되기에 이르렀다.

경원선의 전철화는 개량비로 충당하고, 건설 중인 중앙선 일부의 급경사 구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전철화가 계획되어 건설비 예산액 가운데 전기 운전설비를 시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착공 후에 물가 상승으로 인하여 당초의 예산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에 전기 운전을 분리하여 추가예산이 필요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ㆍ평양ㆍ부산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고속도 전차에 의한 근거리 구간의 여객 수송계획도 일찍부터 그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특히 서울~인천간의 전철화가 대두되었다. 이것은 양 도시간 인구 및 주택문제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서울, 인천, 영등포 등 각 역의 열차 발착 작업 및 구내 차량 정리 등을 간편히 하고 나아가서는 전반적인 열차운행을 원활하게 할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안이 도출되었다. 1937년 6월 1일 일본에 전기과가 신설되면서 실무조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에 처음으로 경원선 복계~고산간 및 경인선의 전철화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예산안이 통과되지 못하여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듬해 1938년에 이르러 이미 건설 공사가 진행중인 중앙선 일부의 전철화 계획 추가 예산도 재정난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1939년에 이르러 경원선 복계~고산간에 총액 359만원이 책정되어 1940년 이후에 공사를 착공하도록 계획되었다. 이에 당초의 계획대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각 노선의 전철화 계획을 구상하였으나 일본의 패망으로 인하여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2-1 전기철도 발달사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산업의 고도화에 따라 물자 유통과 도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수송난과 교통난의 해소가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자동차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도로를 꾸준히 확장하여 왔지만 이제는 도로 교통이 한계상황에 부딪쳐 교통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더구나 자동차는 공기 오염, 소음 발생 등 환경 문제를 유발하여 현대인의 쾌적한 삶을 저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에도 불구하고 교통과 환경 문제는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의 주요 정책 과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전기철도는 효율적인 교통수단으로서 교통문제 해결의 최선의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전기철도는 물자 유통을 원활히 하는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급격하게 팽창하는 도시인구의 이동을 원활하게 해주는 최적의 교통수단으로 부상하였다.

20세기 들어 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철도의 각종 수송수요가 대폭적으로 증가되고 있다. 이에 대한 효율적인 대처 및 경제적인 투자방안에 대하여 선진국에서 많은 연구를 통한 비교분석 결과 수송력 증강과 환경보존을 위한 최적의 대안으로 신선 건설비의 10% 미만이 소요되는 기존선 전철화를 적극 추진하였으며, 선진국의 철도 전철화율은 일본이 60%, 프랑스 45%, 독일 49%, 스웨덴 72%(97년 UIC 통계) 등으로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특히, 교통발달과 경제성장에 따라 날로 심화되는 환경오염 문제는 21세기 최대과제로 세계 도처에서 발생되는 엘리뇨 현상에 의한 기상이변 등 인류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전기철도는 소음, 매연, 폐유처리 등 환경오염이 거의 없는 환경친화적인 대중 교통수단이다. 특히, 타 수송수단과 대기오염 정도를 비교해보면 전기철도를 기준으로 자동차는 8.3배, 트럭은 30배 정도 많은 대기오염 물질을 배출하고 있어 환경보존을 위한 최적의 교통수단으로는 기존선 전철화와 전기철도 확충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오늘날 철도기술의 발전 추세는 열차의 고속화, 자동화에 따른 서비스 개선과 경영다각화 노력의 일환으로 고속철도, 자기부상열차 및 경전철 등 첨단기술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면 전기철도의 획기적인 발전의 전기가 이루어질 것이다.

국내 전기철도 도입 초기에는 기술 및 자재를 외국에 의존하였으나, 수도권 광역전철망 건설과 중앙선 제천~영주 및 영동선 영주~철암 전철화 사업을 통한 기술축적과 국산화 노력에 힘입어 몇 가지 경제성이 낮은 소량 품목의 소요기자재만이 외국에서 수입되었고, 90% 이상 국산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설계ㆍ시공기술은 100% 국내 기술진에 의해 가능할 수 있게 되어 괄목할 만한 기술발전을 이룩하였다.

 
가) 광복 이전의 전기철도
전기철도의 시작은 1879년 5월 31일 독일의 지멘스(Siemens)사와, 할시세(Halsice)사가 베를린에서 열리는 세계산업박람회에 제3궤조 방식으로 직류 150V, 3마력 2극 직권전동기를 사용하여 시속 12km, 20인승 전기기관차를 출품한 것이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81년에 베를린 남부 근교에서 영업을 개시한 것이 전기철도를 최초로 실용화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독일 지멘스의 기술을 도입하여 1883년 프라이던에서 전차가 운행되었고 미국에서는 1880년에 에디슨이 소형 전기차를 개발하여 시내전차를 운행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는 1890년에 동경 우에노 공원에서 박람회가 열릴 때 미국에서 도입한 15마력 500V용 전차가 처음으로 선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899년 5월 4일 미국인 콜브렌과 보스트위크 양인이 조선왕실의 허가를 받아 서대문~홍릉 간에 직류 600V 방식의 노면 전차를 처음 운행한 것이 전기철도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920년대 일제 하에서 사철인 금강산선 전기철도를 1921년 착공하여 철원~금화간을 1924년 8월 1일에 개통하였고 금화~내금강간은 1931년 7월 1일에 완공하여 철원~내금강 간 전구간 116.6km를, DC 1,500V 방식으로 완공하여 전기기관차 운행이 본격화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한국철도의 전철화를 위해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전력정책 기본계획 조서’를 작성하였다. 1926년 11월 총독부에서는 전력정책 기본계획 수립을 위해 일본철도의 전(前) 전기국장 요시하라 시게나리를 한국의 철도ㆍ체신 양국의 촉탁으로 임용하였고 1931년 12월까지 5개년에 걸쳐 3권의 방대한 조사 자료를 완성하였다. 이 조서는 전력의 발생, 분배, 이용의 종합적인 추세를 고려하여 장기 대책을 수립하는데 필요한 기본자료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자료는 단순한 기본조사에 불과하였고, 1932년 이후 다시 철도 전철화의 실행계획이 착수되었다. 전철화 예정 구간으로서 우선 채택된 것은 경원선의 복계~고산 간 53.9km 구간이었다. 이 구간은 한국 중부의 산맥을 동서로 횡단하기 때문에 지형상 선로의 경사가 급하고 터널이 많아 증기기관차로서는 상행 견인력이 부족한데다가 상행 경사 운전의 불안정과 매연으로 인한 승무원의 질식 사고 등 운전상 곤란한 점이 많았다. 또한 특수열차에는 보조기관차를 연결하여야만 그 기능을 유지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 전선으로 향하는 수송량이 점차로 증가함에 따라 이 구간에서도 1938년에는 1931년에 비하여 대략 3배정도 수송량이 급증하였다. 따라서 이후에 증대될 수송량에 대비하여 이 구간의 전철화가 경원, 함경 양선의 수송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써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1935년 12월에는 이 구간의 전철화 계획이 공작과에 의해 입안되기에 이르렀다.

경원선의 전철화는 개량비로 충당하고, 건설 중인 중앙선 일부의 급경사 구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전철화가 계획되어 건설비 예산액 가운데 전기 운전설비를 시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착공 후에 물가 상승으로 인하여 당초의 예산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에 전기 운전을 분리하여 추가예산이 필요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ㆍ평양ㆍ부산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고속도 전차에 의한 근거리 구간의 여객 수송계획도 일찍부터 그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특히 서울~인천간의 전철화가 대두되었다. 이것은 양 도시간 인구 및 주택문제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서울, 인천, 영등포 등 각 역의 열차 발착 작업 및 구내 차량 정리 등을 간편히 하고 나아가서는 전반적인 열차운행을 원활하게 할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안이 도출되었다. 1937년 6월 1일 일본에 전기과가 신설되면서 실무조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에 처음으로 경원선 복계~고산간 및 경인선의 전철화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예산안이 통과되지 못하여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듬해 1938년에 이르러 이미 건설 공사가 진행중인 중앙선 일부의 전철화 계획 추가 예산도 재정난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1939년에 이르러 경원선 복계~고산간에 총액 359만원이 책정되어 1940년 이후에 공사를 착공하도록 계획되었다. 이에 당초의 계획대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각 노선의 전철화 계획을 구상하였으나 일본의 패망으로 인하여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2-1 전기철도 발달사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산업의 고도화에 따라 물자 유통과 도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수송난과 교통난의 해소가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자동차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도로를 꾸준히 확장하여 왔지만 이제는 도로 교통이 한계상황에 부딪쳐 교통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더구나 자동차는 공기 오염, 소음 발생 등 환경 문제를 유발하여 현대인의 쾌적한 삶을 저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에도 불구하고 교통과 환경 문제는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의 주요 정책 과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전기철도는 효율적인 교통수단으로서 교통문제 해결의 최선의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전기철도는 물자 유통을 원활히 하는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급격하게 팽창하는 도시인구의 이동을 원활하게 해주는 최적의 교통수단으로 부상하였다.

20세기 들어 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철도의 각종 수송수요가 대폭적으로 증가되고 있다. 이에 대한 효율적인 대처 및 경제적인 투자방안에 대하여 선진국에서 많은 연구를 통한 비교분석 결과 수송력 증강과 환경보존을 위한 최적의 대안으로 신선 건설비의 10% 미만이 소요되는 기존선 전철화를 적극 추진하였으며, 선진국의 철도 전철화율은 일본이 60%, 프랑스 45%, 독일 49%, 스웨덴 72%(97년 UIC 통계) 등으로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특히, 교통발달과 경제성장에 따라 날로 심화되는 환경오염 문제는 21세기 최대과제로 세계 도처에서 발생되는 엘리뇨 현상에 의한 기상이변 등 인류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전기철도는 소음, 매연, 폐유처리 등 환경오염이 거의 없는 환경친화적인 대중 교통수단이다. 특히, 타 수송수단과 대기오염 정도를 비교해보면 전기철도를 기준으로 자동차는 8.3배, 트럭은 30배 정도 많은 대기오염 물질을 배출하고 있어 환경보존을 위한 최적의 교통수단으로는 기존선 전철화와 전기철도 확충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오늘날 철도기술의 발전 추세는 열차의 고속화, 자동화에 따른 서비스 개선과 경영다각화 노력의 일환으로 고속철도, 자기부상열차 및 경전철 등 첨단기술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면 전기철도의 획기적인 발전의 전기가 이루어질 것이다.

국내 전기철도 도입 초기에는 기술 및 자재를 외국에 의존하였으나, 수도권 광역전철망 건설과 중앙선 제천~영주 및 영동선 영주~철암 전철화 사업을 통한 기술축적과 국산화 노력에 힘입어 몇 가지 경제성이 낮은 소량 품목의 소요기자재만이 외국에서 수입되었고, 90% 이상 국산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설계ㆍ시공기술은 100% 국내 기술진에 의해 가능할 수 있게 되어 괄목할 만한 기술발전을 이룩하였다.

 
가) 광복 이전의 전기철도
전기철도의 시작은 1879년 5월 31일 독일의 지멘스(Siemens)사와, 할시세(Halsice)사가 베를린에서 열리는 세계산업박람회에 제3궤조 방식으로 직류 150V, 3마력 2극 직권전동기를 사용하여 시속 12km, 20인승 전기기관차를 출품한 것이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81년에 베를린 남부 근교에서 영업을 개시한 것이 전기철도를 최초로 실용화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독일 지멘스의 기술을 도입하여 1883년 프라이던에서 전차가 운행되었고 미국에서는 1880년에 에디슨이 소형 전기차를 개발하여 시내전차를 운행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는 1890년에 동경 우에노 공원에서 박람회가 열릴 때 미국에서 도입한 15마력 500V용 전차가 처음으로 선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899년 5월 4일 미국인 콜브렌과 보스트위크 양인이 조선왕실의 허가를 받아 서대문~홍릉 간에 직류 600V 방식의 노면 전차를 처음 운행한 것이 전기철도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920년대 일제 하에서 사철인 금강산선 전기철도를 1921년 착공하여 철원~금화간을 1924년 8월 1일에 개통하였고 금화~내금강간은 1931년 7월 1일에 완공하여 철원~내금강 간 전구간 116.6km를, DC 1,500V 방식으로 완공하여 전기기관차 운행이 본격화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한국철도의 전철화를 위해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전력정책 기본계획 조서’를 작성하였다. 1926년 11월 총독부에서는 전력정책 기본계획 수립을 위해 일본철도의 전(前) 전기국장 요시하라 시게나리를 한국의 철도ㆍ체신 양국의 촉탁으로 임용하였고 1931년 12월까지 5개년에 걸쳐 3권의 방대한 조사 자료를 완성하였다. 이 조서는 전력의 발생, 분배, 이용의 종합적인 추세를 고려하여 장기 대책을 수립하는데 필요한 기본자료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자료는 단순한 기본조사에 불과하였고, 1932년 이후 다시 철도 전철화의 실행계획이 착수되었다. 전철화 예정 구간으로서 우선 채택된 것은 경원선의 복계~고산 간 53.9km 구간이었다. 이 구간은 한국 중부의 산맥을 동서로 횡단하기 때문에 지형상 선로의 경사가 급하고 터널이 많아 증기기관차로서는 상행 견인력이 부족한데다가 상행 경사 운전의 불안정과 매연으로 인한 승무원의 질식 사고 등 운전상 곤란한 점이 많았다. 또한 특수열차에는 보조기관차를 연결하여야만 그 기능을 유지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 전선으로 향하는 수송량이 점차로 증가함에 따라 이 구간에서도 1938년에는 1931년에 비하여 대략 3배정도 수송량이 급증하였다. 따라서 이후에 증대될 수송량에 대비하여 이 구간의 전철화가 경원, 함경 양선의 수송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써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1935년 12월에는 이 구간의 전철화 계획이 공작과에 의해 입안되기에 이르렀다.

경원선의 전철화는 개량비로 충당하고, 건설 중인 중앙선 일부의 급경사 구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전철화가 계획되어 건설비 예산액 가운데 전기 운전설비를 시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착공 후에 물가 상승으로 인하여 당초의 예산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에 전기 운전을 분리하여 추가예산이 필요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ㆍ평양ㆍ부산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고속도 전차에 의한 근거리 구간의 여객 수송계획도 일찍부터 그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특히 서울~인천간의 전철화가 대두되었다. 이것은 양 도시간 인구 및 주택문제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서울, 인천, 영등포 등 각 역의 열차 발착 작업 및 구내 차량 정리 등을 간편히 하고 나아가서는 전반적인 열차운행을 원활하게 할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안이 도출되었다. 1937년 6월 1일 일본에 전기과가 신설되면서 실무조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에 처음으로 경원선 복계~고산간 및 경인선의 전철화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예산안이 통과되지 못하여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듬해 1938년에 이르러 이미 건설 공사가 진행중인 중앙선 일부의 전철화 계획 추가 예산도 재정난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1939년에 이르러 경원선 복계~고산간에 총액 359만원이 책정되어 1940년 이후에 공사를 착공하도록 계획되었다. 이에 당초의 계획대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각 노선의 전철화 계획을 구상하였으나 일본의 패망으로 인하여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1.  전기철도 발달사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산업의 고도화에 따라 물자 유통과 도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수송난과 교통난의 해소가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자동차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도로를 꾸준히 확장하여 왔지만 이제는 도로 교통이 한계상황에 부딪쳐 교통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더구나 자동차는 공기 오염, 소음 발생 등 환경 문제를 유발하여 현대인의 쾌적한 삶을 저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에도 불구하고 교통과 환경 문제는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의 주요 정책 과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전기철도는 효율적인 교통수단으로서 교통문제 해결의 최선의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전기철도는 물자 유통을 원활히 하는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급격하게 팽창하는 도시인구의 이동을 원활하게 해주는 최적의 교통수단으로 부상하였다.

20세기 들어 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철도의 각종 수송수요가 대폭적으로 증가되고 있다. 이에 대한 효율적인 대처 및 경제적인 투자방안에 대하여 선진국에서 많은 연구를 통한 비교분석 결과 수송력 증강과 환경보존을 위한 최적의 대안으로 신선 건설비의 10% 미만이 소요되는 기존선 전철화를 적극 추진하였으며, 선진국의 철도 전철화율은 일본이 60%, 프랑스 45%, 독일 49%, 스웨덴 72%(97년 UIC 통계) 등으로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특히, 교통발달과 경제성장에 따라 날로 심화되는 환경오염 문제는 21세기 최대과제로 세계 도처에서 발생되는 엘리뇨 현상에 의한 기상이변 등 인류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전기철도는 소음, 매연, 폐유처리 등 환경오염이 거의 없는 환경친화적인 대중 교통수단이다. 특히, 타 수송수단과 대기오염 정도를 비교해보면 전기철도를 기준으로 자동차는 8.3배, 트럭은 30배 정도 많은 대기오염 물질을 배출하고 있어 환경보존을 위한 최적의 교통수단으로는 기존선 전철화와 전기철도 확충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오늘날 철도기술의 발전 추세는 열차의 고속화, 자동화에 따른 서비스 개선과 경영다각화 노력의 일환으로 고속철도, 자기부상열차 및 경전철 등 첨단기술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면 전기철도의 획기적인 발전의 전기가 이루어질 것이다.

국내 전기철도 도입 초기에는 기술 및 자재를 외국에 의존하였으나, 수도권 광역전철망 건설과 중앙선 제천~영주 및 영동선 영주~철암 전철화 사업을 통한 기술축적과 국산화 노력에 힘입어 몇 가지 경제성이 낮은 소량 품목의 소요기자재만이 외국에서 수입되었고, 90% 이상 국산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설계ㆍ시공기술은 100% 국내 기술진에 의해 가능할 수 있게 되어 괄목할 만한 기술발전을 이룩하였다.
 
 
가) 광복 이전의 전기철도 
전기철도의 시작은 1879년 5월 31일 독일의 지멘스(Siemens)사와, 할시세(Halsice)사가 베를린에서 열리는 세계산업박람회에 제3궤조 방식으로 직류 150V, 3마력 2극 직권전동기를 사용하여 시속 12km, 20인승 전기기관차를 출품한 것이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81년에 베를린 남부 근교에서 영업을 개시한 것이 전기철도를 최초로 실용화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독일 지멘스의 기술을 도입하여 1883년 프라이던에서 전차가 운행되었고 미국에서는 1880년에 에디슨이 소형 전기차를 개발하여 시내전차를 운행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는 1890년에 동경 우에노 공원에서 박람회가 열릴 때 미국에서 도입한 15마력 500V용 전차가 처음으로 선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899년 5월 4일 미국인 콜브렌과 보스트위크 양인이 조선왕실의 허가를 받아 서대문~홍릉 간에 직류 600V 방식의 노면 전차를 처음 운행한 것이 전기철도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920년대 일제 하에서 사철인 금강산선 전기철도를 1921년 착공하여 철원~금화간을 1924년 8월 1일에 개통하였고 금화~내금강간은 1931년 7월 1일에 완공하여 철원~내금강 간 전구간 116.6km를, DC 1,500V 방식으로 완공하여 전기기관차 운행이 본격화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한국철도의 전철화를 위해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전력정책 기본계획 조서’를 작성하였다. 1926년 11월 총독부에서는 전력정책 기본계획 수립을 위해 일본철도의 전(前) 전기국장 요시하라 시게나리를 한국의 철도ㆍ체신 양국의 촉탁으로 임용하였고 1931년 12월까지 5개년에 걸쳐 3권의 방대한 조사 자료를 완성하였다. 이 조서는 전력의 발생, 분배, 이용의 종합적인 추세를 고려하여 장기 대책을 수립하는데 필요한 기본자료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자료는 단순한 기본조사에 불과하였고, 1932년 이후 다시 철도 전철화의 실행계획이 착수되었다. 전철화 예정 구간으로서 우선 채택된 것은 경원선의 복계~고산 간 53.9km 구간이었다. 이 구간은 한국 중부의 산맥을 동서로 횡단하기 때문에 지형상 선로의 경사가 급하고 터널이 많아 증기기관차로서는 상행 견인력이 부족한데다가 상행 경사 운전의 불안정과 매연으로 인한 승무원의 질식 사고 등 운전상 곤란한 점이 많았다. 또한 특수열차에는 보조기관차를 연결하여야만 그 기능을 유지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 전선으로 향하는 수송량이 점차로 증가함에 따라 이 구간에서도 1938년에는 1931년에 비하여 대략 3배정도 수송량이 급증하였다. 따라서 이후에 증대될 수송량에 대비하여 이 구간의 전철화가 경원, 함경 양선의 수송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써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1935년 12월에는 이 구간의 전철화 계획이 공작과에 의해 입안되기에 이르렀다.

경원선의 전철화는 개량비로 충당하고, 건설 중인 중앙선 일부의 급경사 구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전철화가 계획되어 건설비 예산액 가운데 전기 운전설비를 시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착공 후에 물가 상승으로 인하여 당초의 예산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에 전기 운전을 분리하여 추가예산이 필요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ㆍ평양ㆍ부산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고속도 전차에 의한 근거리 구간의 여객 수송계획도 일찍부터 그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특히 서울~인천간의 전철화가 대두되었다. 이것은 양 도시간 인구 및 주택문제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서울, 인천, 영등포 등 각 역의 열차 발착 작업 및 구내 차량 정리 등을 간편히 하고 나아가서는 전반적인 열차운행을 원활하게 할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안이 도출되었다. 1937년 6월 1일 일본에 전기과가 신설되면서 실무조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에 처음으로 경원선 복계~고산간 및 경인선의 전철화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예산안이 통과되지 못하여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듬해 1938년에 이르러 이미 건설 공사가 진행중인 중앙선 일부의 전철화 계획 추가 예산도 재정난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1939년에 이르러 경원선 복계~고산간에 총액 359만원이 책정되어 1940년 이후에 공사를 착공하도록 계획되었다. 이에 당초의 계획대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각 노선의 전철화 계획을 구상하였으나 일본의 패망으로 인하여 실현되지는 못하였다.